어쩌면 또 다른 현생의 나 (=환영) 일지도 모르는그 사람이 적은 글 전문을 결국 내 멋대로 이곳에 남긴다.그가 말하길, “나는 프랑켄슈타인이었다.”누군가에게
어쩌면 또 다른 현생의 나 (=환영) 일지도 모르는그 사람이 적은 글 전문을 결국 내 멋대로 이곳에 남긴다.그가 말하길, “나는 프랑켄슈타인이었다.”누군가에게 아직도 검정치마의 음악을 듣냐는 질문을 받았다. 갈증 앨범은 올해 내가 접한 최고의 예술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의 이십대 후반을 기억케 할 대표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니, 자신은 발매 당시 기사 난 뒤로 해당 두 곡을 들어보곤, 바로 검정치마를 ‘끊었다’고 말했다.그가 문제가 되었던 그 곡들만을 개별적으로 발표했더라면 나는 분명 아래와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휴일은 분명 한 앨범 단위로 이 창작물을 발표했다. 첫번째 곡 ‘틀린 질문’의 후반부에 두번째 곡 ‘lester burnham’의 전주가 되는 드럼 비트가 미리 흐른다. 심지어는 이 앨범은 3집의 두번째 장으로서, 이 앨범과의 맥락을 고려해야 할 첫번째 앨범과 아직 나오지 않은 세번째 앨범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첫번째 앨범을 듣지 않고 이 앨범을 들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의견이었을 수 있을 것임을, 또한 세번째 앨범이 나온 후의 이 앨범에 대한 나의 생각도 또 다시 바뀔 수 있음을 명확히 하는 바다.) 어떠한 선입견 없이, 창작자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을 하나의 창작물 그 자체로서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이 앨범을 ‘처음 곡부터 끝 곡까지’ 듣는다면, 그가 이 앨범을 통해 말하려 했던 이제는 ‘인간이 되어야 할’ 혐오스러운 주체는 (흉측한 자신은 그녀에게 ‘아무도 아니여야만 하는‘) 죄없는 ‘여성’이 아닌, “나는 프랑켄슈타인이었다.”라 뒤늦게서야 고백하며, 관계의 파국과 자멸에 이르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기괴하고 흉측한 ‘남성’임이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바다. 선율이 아름다울지언정,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을 미화했다.’란 판단은 다소 지엽적인 시야로, 얕은 층위로, 선율과 가사, 곡과 곡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 심지어는 앨범 커버까지, 복합적인 요소로 이루어지는 앨범이란 단위에 예술 매체에 대한 조금은 부족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앨범, 아니 이 앨범의 부분들을 접한 뒤에 나올 수 있는 의견이지 않나 싶다.예술의 역할 중 하나가 우리네 삶을 담는 거라면, 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가 그것에 대해, 궁극적으론, 좀 더 나은 삶과 사회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가져야 할 어떠한 생각과 감정들에 대한 질문들 혹은 나름의 답을 던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에 대해 예술가 각자의 효율적인 혹은 선호하는 혹은 이 주제는 특수적으로 이 표현 방식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표현방식과 매체들로 대화를 청하는 것이라면, 우리네 삶이, 우리의 세상이 결코 아름다운 장면들과 사건들로만 백프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기에, 조휴일이 그저 나름의 표현 방식과 매체들로 그가 생각하고 느끼는 삶의 한 괴기하고 부끄러운 면모를 담아 이러한 면모를 바탕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생각하고 느껴야 할 것에 대해서 함께 논하고자 하는 대화를 청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가 그 대화 끝에 결국 최종적으로 내놓은 그 나름의 답에 가장 가까운 것은, 서사적으로 이 예술 단위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곡 ‘피와 갈증’의 가사이진 않을까하고 그 가사를 한번만 더 곱씹으며 들어줄 순 없는 것일까.우리가 음악만큼이나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예술 매체인 영화에는 서사와 맥락이 있다. 아름답고 예쁜 장면, 때론 흉측하고 기괴하여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불편한 장면을 담은 개별 시퀀스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더럽고 괴기한 이 장면을 또 다른 누군가는, 서스페리아의 후반부 군무씬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타란티노처럼 심지어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각종 시각예술, 서사예술 평론가들은 ‘추醜의 미학’이라는 비평적 용어를 마련했다.) 이 시퀀스들의 서사적 연결, 기승전결을 따라 영화를 끝까지 보고난 후, 우리는 한 작품을 보았다고 판단하며, 불이 켜진 극장을 나와,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감상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에게만, 이 영화는 어떠어떠하다라고 평할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불쾌하고 불편한 장면을 보곤 더 이상 극장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은 관람자의 자유이다. 작품을 매개로 한 창작자와의 대화를 중단하는 것 말이다. 조금 거칠게 말해서, ‘난 더 이상 네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너에 꼬인 속마음과 생각까지 불쾌함 참아가며 힘들여 알고 싶은 의지 없어.’니까.. 그러나 그에게 자신의 의지를 따를 자유는 있을지언정, 못다한 대화들, 자신이 듣지 않은 남은 이야기에 대해, 또 그것들을 모두 다 포함하여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전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평할 권리가 있는지는 지금에 나의 부족한 생각으로서는 잘 모르겠다.사람은 어떠한가. 부분은 결국 전체를 이루기에, 이미 행한 죄악들과 잘못된 과거, 옳지 못했던 행동들, 그렇게 때묻고 더러운 부분이 있는 사람은 결국 ‘때묻은 사람’일 수 밖에 없는건가. 지울 수 없는 건가. 한번 프랑켄슈타인은 영원한 프랑켄슈타인인건가. 과거형 was를 쓸 수는 없는건가. 그럴 자격이 영원히 없는건가.“나도 내가 밤에 하는 짓이 부끄러워끌어안으면 항상 남는 부스러기이러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은걸받은 걸 다 돌려주긴 욕심이 많지.”- 검정치마, bollywood 中.덧붙여서 ‘우리는 죄가 없으니’ 라고 말하는 피와 갈증으로 얼룩진 내 지난 기억들까지. 한 줌이라도 지워낼 수는 없는건지. 나 또한 그럴 자격이 영원히 없는건가. -- source link